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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 - 인문학 관련

by 산책하기 좋은 날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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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그동안 미뤄왔던 책 리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읽은지는 거의 두 달이 넘어가네요^^

그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따로 없었고 이제 여유가 좀 생겨 리뷰를 남겨봅니다.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최진석 교수님이 쓰신 책입니다. 요 책도 친오빠 찬스로 보게 되었어요. 이 책을 만나고 나서 조금은 제 삶의 결이 달라졌습니다. 예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달까요. 이런 기회를 주어서 오빠에게 너무 고마웠네요^^ 인문학은 쉽게 다가서기 어려웠는데 이 책은 술술 읽혀서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려고 책을 다시 훑어보니 문어체보다는 구어체에 가깝게 쓰셔서 더 잘 읽혔던 것 같습니다.

 

 

책의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만들어내는 결이 있고, 앞으로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들어냈던 결을 읽어내고 앞으로 생겨날 결을 예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결을 잘 읽어내고 자신의 사업이나, 일에 접목시키는 것을 잘한 것이라고요. 

 

저도 아이가 자라는 걸 보면서 우리 아이는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 개의 직업만을 가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결이고, 아이가 한창 활동할 시기에는 여러개의 전문 분야를 습득하고 이들을 융합해서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왠지 지금은 생각지도 못했던 직업을 가지게 될 거 같군요.

 

책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발췌하여 실어봅니다.


p. 24 첫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제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인간이 과학기술 문명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가며,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거기에 적응하려고 했던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견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구성하는 기존의 프레임을 지키고 거기서 더 나아지려고 하는 일이 보통 사람들의 행동인데, 이 행동 양식을 벗어나서 프레임 자체를 관찰하고 그 프레임 자체를 달리 하려는 생각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이런 사유의 패턴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것, 이것이 위대함의 출발이라는 얘기입니다. 

 

p.59 첫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고대인과 중세인은 다른 사람입니다. 중세인과 근대인도 다른 사람들이지요.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들입니다만, '생각의 틀'을 다르게 가졌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입니다. (중략) '생각의 틀'이란 바로 '세계관'입니다. (중략) 세계관이 다르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도 달라지고 삶의 의미도 달라지고 제도도 달라집니다. 당연히 시대 구분의 근거는 세계관이 되겠지요? 바로 '철학'인 것입니다.

 

p.62 첫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그렇다면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지요. (중략)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어떤 새로운 사태나 사건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하나요? 대개는 일단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렇게 우선은 정치적 판단을 합니다. 이 정치적 판단을 해주게 하는 것, 이것은 뭡니까?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신념들 때문이지요. 그것들을 기준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사태를 만나고, 그 기준에 맞으면 좋다 하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고 하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이념, 신념 그리고 가치관 등이 자기의 독립성보다 강하여 자기를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인문적 통찰은 불가능하고 더듬이는 없어져요. 

그럼 관건은 뭐냐? 도대체 인문적 통찰을 하는 관건은 뭐냐?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에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p.75 ~ 78 첫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면 안 됩니다. (중략)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자기의 것'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즐길 수 있어야 또 잘할 수 있지요. 즐겨서 잘하는 사람이 결국 그 잘하는 성취로 한국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지요. (중략)

저한테 이런 경험이 있어요. 어떤 학생이 대학원을 오겠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왜 도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지요?" 그 학생이 2분 정도 끙끙 앓더니 겨우 한마디 하더군요. "저는 <도덕경>을 읽을 때가 제일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나한테 사람이 하나 걸어 들어왔구나!' 하는 전율을 느꼈어요. 제 앞에서 스스로 멋쩍은 대답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 그 학생이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사회를 위하거나 국가를 위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자발성으로 비롯된 태도로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기간 내내 행복할 것이고, 그 행복이 그에게 열정을 제공할 것이며, 그 열정이 창의적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p. 202 ~ 205 세번째 인문의 숲 -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학생들(더 넓게는 한국인들)은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자기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하는 데는 너무나 미숙하다는 것을. (중략)

멘토에 의존할 필요 없습니다. 부모님 말씀에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모시는 스승의 말씀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주체가 되어 이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여기서 상상력도 나오고 창의성도 나오며 행복도 나오고 윤리도 나오고 사랑도 나옵니다. (중략) 멘토가 주인이고 자기가 주인이 아닌데 여기서 무슨 행복이 나오고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자기 멋대로 해야 합니다.

 

p. 218 ~ 219 세번째 인문의 숲 -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의 영어 표기가 "To Have or To Be"인 것처럼, 자기 의지에 맞추어 자기가 가져 버리려고 하는 것이 소유적 태도이고, 그것을 그것이게 하거나 그것을 그것 그대로 놓아둘 수 있는 태도가 존재적 태도이지요. (중략)

소유적 태도는 세계에 대한 폭력입니다. 세계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맘대로 제한하거나 고정시키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폭력은 고스란히 자기에게 되돌아옵니다. 세계를 제한하고 고정시키는 자신의 소유적 태도로 인하여 자기 자신도 제한되고 고정되기 때문입니다. 

 

p. 241 네번째 인문의 숲 -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인문적 사고를 시작한다고 하거나 철학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낯설게 할 줄 안다는 말이에요. 낯설게 한 다음에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 낯섦의 발생이나 집요함의 유지가 모두 주체의 활동력, 즉 덕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의 작동이라는 것이죠. 이 관찰의 집요함 속에서 새로 등장한 세계, 그것이 바로 자기의 세계이지요. 그것을 글로 써 놓으면 시가 되고,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노래가 되고, 명중한 범주의 틀로 구성하면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죠. 익숙한 세계가 아니에요.

 

p. 263 ~ 269 네번째 인문의 숲 -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왜 상상력이 부족한가?"라는 물음에 가장 원초적인 대답은 아마 "질문을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 정도일 겁니다. 그럼, 왜 질문을 하지 못한다고요? 바로 자기가 없기 때문이겠죠. 왜 자기는 자기에게서 사라져 버렸는가? 아마 구체적인 기능상에서 말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만날 기회를 박탈당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저는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기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글쓰기를 듭니다. (중략)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몸속에만 머물기 버거운 영혼이 밖으로 뛰쳐나온 것, 그것이 바로 글이죠. 글은 솔직하게 써야 제대로 나옵니다. 진실하게 텅 빈 마음으로 자기를 드러나게 할 때라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죠. (중략) 글을 쓰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대면합니다.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치는 바로 운동입니다. (중략) 숨이 목까지 차올라 옅은 피 냄새가 올라올 정도까지 죽어라 달려 봐야 해요. (중략) 이때 자기를 느끼는 거죠. 한계 속에서 자기를 만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장치'는 낭송입니다. 낭송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죠. 바로 소리를 내서 읽은 다음, 그것이 다시 내 귀에 들어오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낭송을 하면 읽은 내용이 육체적인 감각을 건드려 내면화하게 됩니다. (중략)

글쓰기를 하고 자주 시간을 내어 낭송을 하며 항상 운동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듣기만 해도 얼마나 윤기 나는 사람입니까?


책에 있는 좋은 내용을 저 혼자 알기 아깝기도 하고, 제가 나중에 다시 보고 싶기도 해서 키보드로 필사해봤습니다. 필사는 중략된 부분이 많으니 교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온전한 내용을 알려면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죠^^ 저도 시간 날 때 띄엄띄엄 읽었는데 소설이 아니다 보니 시간차를 두고 읽어도 내용이 잘 들어왔어요. 

 

육아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뭔가 학교를 다니거나, 자격증을 따서 다음에 하게 될 일을 대비해보자 했는데, 그런 것들도 필요하지만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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